마이다스동아일보:[98바캉스특집]

개그맨 김미화

힘찬 새 출발을 격려해 준 마음의 고향
설악산

방송 생활을 하는 사람은 시간을 내서 여행을 가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두 아이의 엄마이다 보니 시간을 내는 일이 더 쉽지가 않다. 여름철에도 남들은 휴가다 피서다 해서 멀리 떠나지만 나는 고작 아이들과 가까운 곳에서 더위를 식힐 뿐이다.

그러나 새마음, 새각오로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설악산에 올라볼 일이다. 설악산은 내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고 힘찬 출발을 할 수 있게 격려해 준 장소다.

내가 개그맨으로 데뷔를 한 것은 83년 MBC를 통해서였다.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 그동안 고생하신 어머니를 위해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과 개그맨이 되고 싶다는 열망만이 나를 사로잡고 있던 스무 살 시절이었다. 그런 내게 MBC 입사는 꿈의 실현이었다. 개그맨이 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리라 믿어왔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열심히 하고 싶은 것은 마음뿐, 1년 동안 이렇다 할 배역을 맡지 못했다.

나는 빠른 속도로 스스로에게 지쳐 갔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었다. 생각 끝에 방송국을 옮겨 다시 입사 시험을 치르었다.

84년 KBS에 입사를 하고 처음 떠난 것이 개그맨 워크숍이었다. 원로 선배님들과 방송 관계자들의 강의도 듣고 동료들과 등산도 했다.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며 그동안 잘 풀리지 않았던 일들을 되짚어 보았다. 열심히 산 것은 분명하지만 조급하게 굴었던 나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회는 준비하는 사람의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지난 시간 동안의 나를 되돌아보니 앞날을 희망차게 열어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감이 생겼다.

워크숍 기간 중 만난 이름도 모르는 스님의 말씀도 내겐 큰 가르침이 되었다. 어느 날인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등산을 한 일이 있었다. 점심때가 되니 다들 시장기가 돌았다. 당시는 설악산에서 취사가 가능한 시절이었다. 우리들은 준비해 온 고기를 구워먹으려고 적당한 장소를 찾았다. 평지에 가까운 얕은 언덕이 있어 자리를 펴고 보니 절집 문 앞이었다. 장소를 옮기자는 둥, 그냥 먹자는 둥, 사람이 그럴 수는 없다는 둥 티격태격하다 절 안으로 들어가 스님께 물었다.

“스님, 저희가 고기를 구워먹으려는데 어디가 좋을까요?”

그러자 스님은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절에서 조금 떨어진 아늑한 언덕을 가르쳐 주셨다.

“절 앞에 와서 죄송합니다.”

“몰라서 묻는 건 부끄러운 일도 미안한 일도 아닙니다. 개의치 마십시오.”

익히 많이 들어서 알고 있는 말이었지만 그날은 그 말이 새롭게 들렸다. ‘앞으로는 겸손하게 모르는 일은 모른다고 인정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과 해답을 구하자’고 생각했다.

그 이후 나의 생활은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 비해 마음의 여유를 많이 찾을 수 있었고 겸손해졌다. 마음을 비웠기 때문인지 KBS에 입사하고는 일이 순조롭게 풀려 나갔다.

그 이후 시간을 내 설악산을 다시 찾은 적은 없지만 힘들고 지칠 때면 그때를 생각한다. 마음을 비우면 새 길이 보인다. 아이들과 함께 집 뒤에 있는 산에 오르면서도 생각한다. 아직도 설악산은 그 자리에 있겠지. 그곳을 찾은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