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새 인사 ‘부자 되세요’ 신드롬

‘富에 대한 욕망’ 현실 표출 … 남녀노소 어디서나 주식·부동산 ·다단계판매 등 화제로 “어떻게 하면 돈 벌까”

"여러분, 여러분…. 모두 부자 되세요. 꼭이요.” 한 카드사 CF에서 여성 탤런트가 던진 이 깜찍한 한마디가 한국인들을 사로잡았다. 설 연휴 동안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전통적 인사법을 밀어냈고, 연하장도 이메일도 온통 ‘부자 되세요’로 시작된다. 이 CF를 제작한 다이아몬드 베이츠 코리아의 조형준 차장은 “부자 되라는 덕담을 싫어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데 착안해 새해 캠페인 문구로 정했다”고 한다. 실제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들어도 들어도 기분 좋다”는 반응이 대부분. 부담 없는 사이라면 ‘돈 많이 버세요’ ‘대박 터뜨리세요’ 식의 돈 냄새 물씬 풍기는 인사도 싫지 않다.

그렇다면 한국인이 생각하는 부자의 기준은 무엇일까.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의 저자 로버트 기요사키는 부자를 “돈을 위해 일하지 않고, 돈이 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고 다소 추상적인 정의를 내렸지만, 부자인지 아닌지의 기준은 역시 돈이다. 2월 초 삼성증권이 4649명의 투자자를 대상으로 ‘부자의 기준’에 대해 온라인 설문조사를 한 결과 부동산을 포함해 10억~50억원은 있어야 한다는 대답이 42%(1998명)였고, 50억원 이상 22%(1023명), 5억~10억원이 19%(914명)였다. 목표를 10억원으로 낮춰 잡는다 해도 월급 한두 푼 아끼는 것으로는 엄두도 내기 어려운 액수다.

‘묻지 마 투자’ 옛말 … 주부 위한 재테크 특강 유행

사람들은 이미 부자가 되고 싶은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부자가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투자의 예술가’로 불리며 유럽 최고의 부자로 꼽히던 앙드레 코스톨라니는 단숨에 백만장자가‘투자의 예술가’로 불리며 유럽 최고의 부자로 꼽히던 앙드레 코스톨라니는 단숨에 백만장자가 되는 세 가지 비법을 제시했다.

첫째, 부유한 배우자를 만난다.
둘째, 유망한 사업 아이템을 갖는다.
셋째, 투자를 한다.

인터넷 레저쇼핑몰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낸 ‘넷포츠’의 박인철 사장(31)은 코스톨라니의 기준에 따르면 두 번째 비법으로 부자가 된 경우. 그는 군대시절 사업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수첩에 기록해 두었는데 나중에 삼성전자 면접시험에서 이 수첩이 화제가 될 만큼 수백 가지 아이디어가 담겨 있다. 빌 게이츠나 국내외 벤처계 스타들 대부분이 두 번째 유형에 속한다. 그러나 창업 열기가 한풀 꺾이고 아이디어도 없는 사람들은 투자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다.

모어리치텍 대표인 이선무씨(36)는 IMF 시절 주식시세가 바닥일 때 우량주를 사서 상승했을 때 파는 고전적인 투자기법으로 부자가 됐다. 1100원에 산 주식이 30만원까지 올라 이른바 ‘대박’이 터진 것. 그는 지금도 20% 이상의 수익을 올리지 못하면 ‘재테크’라 부를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절대 단기매매를 하지 않습니다. 1년에 딱 두 번만 사고팔죠. 사람들은 얼마나 높은 가격에 팔 것인지만 생각하지만, 수익률은 살 때 결정합니다.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주식을 사면 마음 편하게 상승기를 기다릴 수 있지만, 너무 비싸게 샀다는 생각이 들면 조급하게 매매를 하게 되고 그만큼 손해를 보거나 적은 이익에 만족해야 합니다. 적절히 살 때와 팔 때를 아는 것은 그 사람의 경제에 대한 지식 수준에 달렸죠.”

최근에는 일반인을 위한 주식투자에 관한 책들도 입문서 수준을 벗어나 전문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대표적인 예가 ‘21세기 북스’의 ‘팍스넷 필살기 시리즈’. 주식투자 전문사이트인 ‘팍스넷’의 애널리스트들이 자신의 투자 노하우를 한 가지씩 전수하는 방식인데 주식투자를 할 때와 쉴 때의 구분을 강조한 백경일씨의 ‘급등주 핵심패턴 100’과 ‘팔면 오르고, 사면 내리는’ 낭패에서 벗어나기 위해 꼭 알아야 할 추세선을 강조한 하누림의 ‘추세전환의 비밀’ 등이 있다. 팍스넷은 2월 말경 3주 종일 코스의 ‘주식투자 실전사관학교’를 열고 전업투자자들을 집중 양성하겠다는 계획이다.

한때 객장에 시장바구니 들고 오는 주부들을 ‘묻지 마 투자’라고 비웃었지만 이것도 옛말. 백화점 문화센터마다 주부들을 재테크 도사로 키워내는 경제특강이 유행하고 있다. 3월부터 미도파 상계점 문화센터에서 ‘부자엄마 가난한 엄마’라는 제목의 특강을 진행하게 된 박정일 제일은행 수신상품팀 부팀장은 “과거 주부대상 강의가 예금상품 안내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고수익 투자에 대한 고급정보를 요구한다”고 말한다.

올 초 갤럽은 국내 주식투자 인구를 전국 성인의 10.3%인 약 346만명으로 추산했다. 이들이 예측하는 올해 주가지수 전망은 밝지만, 실제 지난 1년 동안 매매 결과를 보면 손해를 본 사람이 60.4%에 달한다. 손실률은 52.3%. 투자한 돈을 반타작했다는 의미. 이처럼 주식시장이 치열한 정보전과 심리전으로 치달으면서 투자방향을 부동산으로 바꾸는 이들도 많다. 제일제당에 다니는 김모 과장(40)은 보유하고 있는 우리사주 외에 주식거래를 전혀 하지 않는다. 본격적으로 주식에 매달리게 되면 업무에 지장이 많은 데다 도저히 전업투자자들과 경쟁에서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은행 적금을 들어 착실하게 돈을 모았지만 요즘은 이자가 너무 적어 저축이 아니라 오히려 손해 보고 있는 느낌이라고. 올해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지방이나 제주도에 땅을 조금 살 계획이다. 그는 빚도 없고 특별히 투자도 열심히 하지 않는 자신이 오히려 동료들 가운데 이상한 편에 속한다고 말한다.

지난해 재테크 성적표 소형 아파트·주식·채권 順

‘대신증권’ 조사결과를 보면 지난해 재테크 성적표는 소형아파트, 주식, 채권, 금, 은행예금 순. 부동산 분야 역시 청약통장에 매달리는 대신 투자 대상을 다변화하는 추세다. 특히 경매 쪽은 지난해 초 명지대 증권보험대학원 경매상담사 과정 강사인 이승주씨(32)가 분양가 8500만원짜리 상가를 10% 가격인 850만원에 낙찰받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제히 눈길이 쏠렸다. 물론 이씨의 성공 노하우는 경매에 나온 부동산의 복잡한 권리관계를 분석해내는 전문지식. 최근 백화점 문화센터에도 ‘실전 공경매 부동산 가이드’ ‘라이프 스케줄과 부동산 투자’(임대, 리모델링. 리츠)와 같은 전문강좌가 등장했고, 대학마다 부동산 관련 특수대학원(명지대, 건국대, 경기대, 중앙대) 설치가 유행할 만큼 열기가 높다.

‘부자’ 신드롬의 진원지로 연 50%씩 급성장하고 있는 네트워크 마케팅도 빼놓을 수 없다. 흔히 다단계판매로 알려진 네트워크 마케팅은 그간 부정적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직장인과 전업주부들 사이에서 맨주먹으로 ‘부’의 신화를 이룰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으로 떠올랐다. 국내 최대 다단계판매 회사인 한국암웨이의 경우 등록회원 수만 120만명. 암웨이 조직에서 실적에 따라 부여하는 회원자격 루비, 다이아몬드, 크라운, 크라운 앰배서더가 곧 부와 성공의 척도로 여겨질 만큼 우리 사회 깊숙이 퍼져 있다. 국내에 최초로 암웨이를 소개했다는 김재원씨가 네트워크 마케팅에 대해 쓴 책의 제목이 ‘5년 안에 평생 쓸 돈 버는 비결’. 바로 보통사람들의 꿈을 대변해 주는 말이기도 하다. 한 국립병원 의사는 “요즘 의사들끼리 모여도 네트워크 마케팅 이야기뿐이다. 누가 다이아몬드가 되느냐가 최고의 화제”라고 한다. 최근에는 국내 굴지의 기업이 사내 네트워크 판매자를 해고하는 등 극약처방을 내렸지만 ‘부자가 되고 싶다’는 의지를 꺾는 데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이미 기업, 연구소, 의사, 변호사, 교사, 교수, 대학생들까지 네트워크 마케팅이 퍼져 있다.

“돈 욕심 지나치면 편법 성행·사회 불안 우려”

어린이 조기 경제교육 열기도 경제 과외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뜨겁다. 경제용어를 배우고 절약 습관을 길러주는 수준을 넘어 돈을 버는 투자의 개념을 가르친다. ‘어린이 경제교실’을 운영중인 ‘네오머니’의 관계자는 “돈의 개념이나 용돈 관리법 등을 중심으로 강의를 진행하지만 다른 강좌에서는 주식투자 기법도 가르치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이와 함께 ‘열두 살에 부자가 된 키라’ ‘펠릭스는 돈을 사랑해’와 같은 어린이용 경제동화와 자녀교육 지침서인 ‘스마트 머니, 스마트 키드’ ‘단지 현명한 부모를 두었을 뿐이다’ 등도 꾸준히 팔린다. 비룡소의 장은수 편집장은 ‘펠릭스는 돈을 사랑해’(원제 ‘펠릭스는 돈을 좋아해’)라는 책 제목을 놓고 어떻게 어린이 책에 이런 제목을 다느냐며 편집실 내에서 반발이 심했다. 그러나 막상 독자들의 반응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2년 전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에 이어 ‘부자 되세요’ 신드롬이 돈에 대한 우리의 이중적 가치관을 완전히 벗겨놓은 데 대해 우려하는 이들도 많다. 용인정신병원의 하지현 정신과 전문의는 “70년대 ‘잘살아 보세’가 우리 사회 나아가 나라 전체가 잘살도록 노력하자는 의미였다면 21세기 유행어인 ‘부자 되세요’에는 철저히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만족만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또 “기존 룰대로 하면 절대로 ‘깜짝’ 놀랄 만큼의 돈을 벌 수 없다. 사람들이 원하는 부를 얻으려면 룰의 틈새를 보거나 그 룰을 깨야 한다. 바로 우리가 편법이라고 하는 것이고, 이것은 사회적 불안을 야기한다”고 우려했다. 한신대 김종엽 교수(사회학)도 ‘시대유감’이라는 책에서 “주식시장의 활황 속에서 모든 사람들은 더욱 민활한 개인이 되고, 그로 인해 집합적 현안을 제치고 개인적 생존과 번영을 추구하는 프티 부르주아적 문화를 확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더 이상 ‘황금을 돌같이 알라’는 가르침이 먹히지 않는 현실에서 ‘개같이 벌어 정승처럼 살겠다’는 시대의 요구에 맞는 새로운 가치관이 필요하다. 요즘 중국의 새해 인사는 ‘마따오청공’(馬到成功), ‘곧 성공하세요’라고 한다. 내년에는 ‘부자 되세요’를 대신해 ‘빨리 부자 되세요’라고 인사하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