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다스동아일보[동아일보매거진:주간동아 207호]

■주간동아 칼럼 '학살 사건'의 해법

AP통신이 노근리 양민집단학살 사건을 폭로한지 한달이 지났다. 그 이후 거의 이틀에 하나 꼴로 유사한 만행이 제보됐다. 지난주부터 정부가 노근리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피해신고 접수에 착수했으나, 아직까지 이 문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리될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한-미 양국 정부는 당위론적 차원의 입장만을 제시해 둔 채 여론의 동향을 계속 주시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런데 막상 세간의 분위기는 예상 외로 차분하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사안 자체의 범속성(凡俗性)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노근리 사건에 대한 해법이 워낙 어렵고 복잡하여 아무도 쉽게 엄두를 낼 수 없는 까닭이다.

노근리 사건이 지닌 잠재적 위력은 실로 메가톤급이다. 이것은 한국전쟁의 성격은 물론 한-미 관계의 진실, 나아가 냉전과 세계체제의 본질까지도 흔들 수 있는 ‘위험한’ 인화물질이다. 그러므로 한풀이를 위한 감정적 접근은 사안의 순리적 해결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차피 그와 같은 비극적 사건이 아예 없었던 일로 되돌아갈 수 없다면, 해결의 방향은 현재 시점과 미래 관점에서 무엇을 실리로 취할 것인지 쪽으로 가닥을 잡아야 할 것이다. 만약 이 사건에 임하는 모든 당사자들이 ‘윈윈’(win-win) 전략을 외면한다면 노근리는 또다시 무서운 지뢰밭으로 남게 될지 모른다. 결국, 이것은 고난도의 ‘정치적’ 게임으로 귀결될 공산이 높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정치적 ‘흥정’을 의미해서는 안된다.

미군의 양민학살사건에 대한 합리적 수습을 위해 가장 절실한 것은 한국 정부의 능동적 자세다. 가해자인 미국이 이 사건의 조사 및 처리과정을 주도하는 것은 우선 상식적으로 난센스다. 자국 주민의 억울한 피해를 밝히고 그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마련해야 하는 마당에 외국정부에 대한 ‘협조와 공조’를 운운하는 정부라면 그것은 국가의 위신이 아니라 자격에 관련된 문제다. 한국정부는 조사의 대상이지 주체가 될 수 없는 미국의 눈치를 살필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차원의 범국민적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고 유엔이나 국제적 인권단체의 참여와 협력을 모색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불평등한 현행 한-미 행정협정도 우리 정부 주도로 시급히 개정해야 한다. 과거도 문제지만 지금 현재에도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주한미군의 민간인 대상 범죄를 계속 방치한다면 이는 노근리에 대한 치명적 모독이 아닐 수 없다.

가해자 형사처벌 피하고 우리 정부서 보상을

한편, 가해자에 대한 형사처벌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낫다. 이미 노근리 주민조차 이를 거론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거니와, 당시 참전미군 역시 전쟁의 광기(狂氣)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고 지금 눈물로 참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저한 조사를 통한 사자(死者)의 명예회복과 함께 생존 가족에 대한 정당한 보상은 피할 수 없다. 다만 이것 또한 미국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부담하는 편이 보다 효과적일 것이다. 미군 참전에 대한 보은적 의미는 결코 아니다. 대신 미국정부에 의한 몇푼의 구차한 경제적 위로가 오히려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호도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과거와는 달리 ‘먹고 살 만한’ 우리가 피해자 가족을 국가보훈자 대상으로 먼저 포용할 경우, 이는 미국의 맹성(猛省)을 촉구하고 한-미 관계를 재정립하는 일에도 큰 힘이 될 것이다. 김대중정부는 한국전쟁 발발 50주년과 새로운 밀레니엄의 개막을 동시에 맞이하는 역사적 시점에서 이번 사건의 해결을, 전쟁 자체의 비극을 되새기고 평화와 인권을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선양할 수 있는 기회로 반전시키기 바란다. 그리하여 차제에 베트남에서 자행된 한국군의 양민학살 문제를 정부가 먼저 공론화하기를 권고한다. 왜냐하면 이는 20세기 아시아 전쟁의 주역인 일본과 미국에 무언의 압력을 행사함으로써 아직도 남아 있는 과거 전쟁의 유산을 함께 청산하는 일대 계기를 마련할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노근리의 세계화다. 김대통령이 아끼는 ‘인권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 멀리 동티모르까지 갈 필요는 없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다.

전상인 / 한림대 교수 . 사회학